휴식의 언어
안진국(미술비평)
모든 텍스트는 새로 기록되고 있는 중이다. 텍스트는 현전(現前)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김자이 작가는 그동안 자신의 언어 찾기에 몰두해 왔다. 라캉은 무의식이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작가는 자신의 무의식이 자신의 언어로 가득 차 있다고 판단했고, 그것을 ‘번역’을 통해 의식의 수면 위로 끌어올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번역은 원본의 재현을 의미한다.) 하지만 데리다는 의식·전의식·무의식의 층위 사이에서 일어나는 이동은 ‘번역’으로 옮길 수 없다고 봤다. 심리적인 기록은 사후성(Nachträglichkeit)에 의해서 지배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심리적 텍스트(무의식)는 원초적으로 존재한다기보다는 사후적으로 발견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데리다에 의하면, 심리적 텍스트는 ‘번역’으로 현상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 기록된다. 이렇게 본다면, 김자이 작가의 (자기) 언어 생산 방식은 무의식의 번역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언어의 기록인 동시에, 심리적 텍스트(무의식)의 발굴이다. 김자이 작가의 작품이 낯익음과 낯섦이라는 상반된 느낌을 동시에 주는 이유는 어쩌면 이 때문일 것이다. 사후적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작가가 지니고 있었던, 그렇지만 아직 발견되지 않았던 낯익은 어떤 것이고, 그것이 낯선 새로운 형태로 기록(표현)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낯익음과 낯섦의 경계에서 형성하는 작가의 언어는 작가의 삶이나 심리 상태와 긴밀한 연관되어 있다. 작가의 삶이나 심리 상태의 굴곡에 따라 그 언어가 다양한 방식으로 새롭게 쓰이기 때문이다. 이번에 작가가 생산하고 발굴하게 된 새로운 언어는 ‘휴식’이다.
심리적 텍스트와 현실이 맞닿는 지점
김자이 작가의 ‘휴식의 언어’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작가의 이전 작업을 들춰볼 필요가 있다. 작가는 ‘자신의 언어 찾기’라고 말할 수 있는 자기 탐구라는 큰 맥락 속에서 감각적이고 구조적인 시각적 형상을 드러내는 작업을 해왔다. 이 작업 방식은 형식적 측면은 크게 세 층위로 구성되는 것처럼 보인다. 첫째, 미니멀리즘의 감각, 둘째, 시각적 구조화, 셋째, 과거의 수집이다. 이 세 층위는 각각 ‘감성’, ‘시각’, ‘기억’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표현 방식으로 보인다.
작가는 자신의 언어를 단순한 색채의 사각형이나 박스로 드러내는 방식을 보여 왔다. 이러한 방식은 작품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감성적 자극으로 다가온다. 단순한 형태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정체 모를 감성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미니멀리즘의 감각’ 정도로 말할 수 있을 텐데, 다른 작업이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텍스트나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는 것에 반해서, 사각 형태의 정제된 작업은 모호하고 추상적이며 대단히 감성적이다. 이런 감정이 드는 것은 작가가 사각 형태를 드러내는 방식이 라이트 박스 형식이나 형광 색채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시선을 강렬하게 붙잡는 색채와 단순한 사각 형태는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사각 형상을 감성적 차원까지 끌어올리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 감각적 형태는 무의식 형상과 연결된다.
둘째로, ‘시각적 구조화’는 작가에게 체화된 구성력의 흔적으로 보인다. 이것은 작가가 학부 때 판화를 전공했던 것과 관련 있는 듯하다. (참고로 석사 및 박사 과정에서는 판화를 전공하지 않았다.) 판화는 철저한 준비와 계산속에서 제작되는 미술장르이다. 무수한 과정을 거치지만 결국 단 한 번의 찍어냄, 즉 일회적이고 순간적인 사건을 통해 작품이 완성된다. 이러한 판화의 특성 때문에 최종적 사건 이전에 고려해야 할 것이 많다. 좌우가 바뀌는 형상의 문제(공판화 제외)나 복잡한 제판(製版) 방식, 프레스의 사용 방식 등 최종적 프린트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많다. 따라서 판화는 스케치 단계부터 구성적 치밀함을 갖게 된다. 작가가 이전에 제작했던 레디메이드(Ready-made) 인쇄물 작품의 작업 방식은 이미 존재하는 인쇄물을 적절하게 재단하고, 그 인쇄물에 새로운 형상을 부착하거나 그려서 완성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작업 방식은 언뜻 보면 순간적이고 무작위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이 작품들 하나하나는 그 모양새가 매우 시각적으로 구조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작가에 체화된 시각적 구조화와 연관 있어 보인다. 또한, 작가가 작품을 전시공간에 디스플레이하는 방식에서도 변화와 균형의 적정성을 고려하는데, 이것도 작가가 판화를 전공하면서 체화된 구성력이 반영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고려와 판단을 하지 않더라도, 이미 존재하는 인쇄물을 선택하는 것 자체로도 판화를 전공하며 체화되었던 작가의 기억이 무의식적으로 발현되고 있음을 유추하게 한다.
또 다른 표현 양식으로 과거의 수집을 들 수 있다. 작가는 과거를 수집하여 ‘아카이브’ 형태로 진열장에 진열하거나 새롭게 만든 공간에 디스플레이하는 작업도 선보여 왔다. 이것은 작가의 언어가 역사적 맥락과 맞닿는 지점이다. 무의식은 개인의 잠재된 역사(기억)라고 할 수 있다. 과거의 축적은 개인의 취향을 만들고 성격을 형성한다. 다시 말해 인식 불가능한 과거의 축적(역사)이 개인의 성향을 형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작가가 선택하는 과거는 분명 작가의 무의식적 기억(역사)과 호응한다. 그렇기 때문에 김자이 작가의 오래된 것에 대한 관심은 존재하지만 인식 불가능한 어느 지점에서 잠들어 있는 무의식적 기억을 깨우는 언어라 할 수 있다. 작가가 선택한 대상물은 간혹 우리의 시선을 붙잡게 되는데, 우리와 작가의 무의식적 기억(역사)이 공유하는 지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공유 지점은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우리와 작가의 삶의 궤적이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작가의 언어가 소통 가능한 언어로써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우리와 작가와의 공유지점이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휴식의 기술을 위한 휴식의 언어
개인의 무의식적 언어를 시각적 언어로 새롭게 기록하고 있는 김자이 작가가 이번에 발현하는 언어는 휴식의 언어이다. 이 언어의 시작은 “과거에 나는 휴식을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다”(작업노트)라는 작가의 회고에서 기인한다. 몸과 무의식은 의식과 다르게 과거의 시간을 잊지 않고 기억한다. 이것은 축적이다. (의식은 자주 우리의 과거를 잃어버린다. 그 잃어버린 과거는 무의식의 심해에 가라앉게 된다.) 작가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무형의 압박으로 작동하는 ‘자기계발’ 의식에 사로잡혀 몸과 무의식의 특성, 절대로 과거를 잊어버리거나 잃어버리지 않는 특성을 간과했던 것 같다. 작가가 그동안 행했던 더 높이 날아오르려는 의식적 행동은 몸과 무의식에 피로를 축적시켰다. 그 축적이 한계점에 다다랐을 때, 결국 몸에 이상 징후가 발견되었고, 의식의 날개는 꺾였다. 미래를 향한 무한 가속이 과거를 축적하고 있는 실체에 영향을 준 것이다. 김자이 작가는 이 경험을 통해 미래를 높이 날아오르는 것과 과거를 기억하는 것 사이의 상관성을 발견하였고, 그 조율의 중요성을 느꼈던 것 같다. 이러한 경험이 자신의 무의식에 침전된 휴식의 언어를 의식의 밖으로 끌어내려는 예술적 시도로 이어진 듯하다.
작가는 휴식의 언어를 시각화하기 위해 사전 작업으로 휴식의 개념에 대한 리서치를 시작했다. 작가의 리서치에 의하면, 휴식은 영어로 REST와 RELAXATION가 통상적으로 사용되는데, REST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정적인 휴식’을, RELAXATION는 가벼운 운동이나 산책 등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동적인 휴식’을 의미한다고 한다. 작가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휴식은 마음(정신)을 쉬게 하는 것이고, 몸을 움직이는 휴식은 새로운 에너지를 만드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그 외에도 김자이는 다양한 휴식 관련 정보를 수집하였다. 작가는 이렇게 수집된 정보를 의식적 수준으로 끌어올린 휴식의 언어로 조율하는 방식을 고민하였다. 이번 《휴식의 기술》은 정적인 휴식과 동적인 휴식에 대한 탐색을 바탕으로 무의식적 휴식의 영역을 의식적 휴식의 언어로 발현하기 위한 고민한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김자이가 휴식의 언어를 드러내는 방식은 관계미학적 형식을 보인다. 니콜라 부리요(Nicolas Bourriaud)가 관계미학(Relational Aesthetics) 예술을 “모든 대화가 시작되는 열려 있는 공간이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김자이는 우리에게 휴식의 언어를 건네며 열려 있는 공간으로 우리를 유도하는 대화를 시도한다. 작가는 우리의 손에 휴식에 대한 체크리스트를 쥐여 주고, 다양한 휴식 체험 방식을 제공한다. 관람자는 작가가 제공한 휴식 체험을 거치면서 체크리스트를 작성하고, 자신에게 맞는 휴식 방법을 발견하게 된다. 체크리스트는 작가와 관람자의 휴식에 대한 대화이며, 함께 참여했던 관람자와 관람자 사이의 대화를 이끌어내는 가능성으로 작동한다. 이것은 관계미학적 특징으로 볼 수 있지만, 능동적 수행성이 필요하고 행위의 개별성이 강하다는 측면에서 사실 부리요가 의미했던 관계미학과는 조금 다른 결을 가지고 있다. 부리요가 관계미학적 작업으로 적합하게 봤던 작가는 리크리트 티라바니자(Rirkrit Tiravanija)나,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Félix González-Torres) 등으로, 그들은 함께 음식을 먹는다던가(리크리트 티라비니자), 사탕이나 포스터를 가져간다던가(펠릭스 콘잘레스-토레스) 하는 등 관람자의 수행성이 약한 수준들 요구하며, 타인과 공유하는 행위로 진행된다는 특성이 있다. 이러한 특성을 지닌 관계미학적 전시는 휘발성이 강할 수 밖에 없는데, 일시적으로 공동체를 형성하고 곧바로 흩어져버리기 때문이다. 이에 비하면 《휴식의 기술》은 휘발성과 일시성보다는 조금 진중한 지점이 존재한다. 작가는 관람자에게 관람자 자신의 휴식 방법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돕고, 그것이 미래의 휴식 방법에 영향을 미치게 한다. 이것은 부리요가 제시했던 관계미학과는 달리 휘발하거나 일시적이지 않고 지속할 수 있도록 지점을 보유하게 한다. 《휴식의 기술》도 작품 자체보다는 휴식의 언어를 공유하는 하나의 플랫폼이다. 《휴식의 기술》에서 구체적으로 제시되는 작업물은 영상이나 손뜨개질, 체크리스트 등이지만, 이 전시의 실재적인 작품은 관람자가 휴식하는 행위이며, 이를 통해서 자신의 휴식 방법을 깨닫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부리요가 제시했던 관계미학과는 조금 다른 면이 있을지라도, 하나의 플랫폼으로 기능하는 측면에서는 여느 관계미학 예술과 다르지 않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김자이의 예술은 현재 물질적 형태에서 비물질적 형태로 변하고 있다. 자신의 언어를 구조화시키는 방식도 기존엔 완결된 형태를 제시하는 방식이었지만, 지금은 과정을 제시하고 전시에서 완성하는 방식으로 변하고 있다. 이번 《휴식의 기술》이 체크리스트를 통해 사후적으로 자신의 휴식 방법을 알게 되듯이(기록되듯이), 무의식의 번역보다는 무의식의 사후적 발견으로 나가는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그 언어는 작가 자신의 언어를 발현하는 것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모두 각자의 언어를 발견할 수 있도록 이끌어가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작가는 무의식적 언어의 번역 불가능성을 직감적으로 알고, 감각적으로 사후적 발견을 통해 (재)기록의 형태로 나가고 있는 줄도 모르겠다. 이렇게 물질성(물리적 전시 실체)과 비물질성(수행성)을 결합하고, 무의식의 언어를 감성, 시각, 기억을 넘어 ‘휴식’으로까지 확대하는 모습은 작가가 사유하는 범위가 그만큼 넓어졌음을 깨닫게 한다.(끝)